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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뉴우스/시사(時事)

제1회 현충일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은 불참이라고???

1956년 4월 19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대통령령 제1145호) 및 "현충 기념일에 관한 건"(국방부령 제27호, 1956년 4월 25일)에서 "현충 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1965년 3월 30일 "국립 묘지령"(대통령령 제2092호) 제17조에 의거 연1회 현충식을 거행하게 되었다.-위키백과-

1956년 6월 6일이 제1회 현충일입니다.
현충일 관련 과거 신문을 보다가 경향신문 기사를 보니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당시 부통령 아니었습니다.물론 그해 부통령 떨어지고 1960년 3.15부정선거로 부통령당선.이기붕 그러면 '사사오입' 사건이 유명하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번복, 가결을 강행하였다.))

여튼,첫회 현충일부터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참~~ ↓↓↓↓아래는 1956년 6월 7일 목요일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국군 묘지에서 추도식 엄수
제1회 현충일의 행사

제1회 현충전몰장병추도식은 6일 오전 10시부터 한강기슭에 넓게 자리잡은 동작동 국군묘지에서 유가족 대표 237명과 부통령(이대통령불참) 대법원장 국회의원(이기붕 의장 불참)그리고 각국외교사절 육해공군 장병 및 군악대 학생단체 동민등이 참석한 가운데 3발의 조포로 개식이 되며 이십분만에 추도사 없는 추도식을 엄숙히 끝마치었다. 흰빛 사당문을 통한 안쪽에는 팔만팔천오백사십일주의 전몰 장병들의 넋을 모신 "무명용사의영"이라 씌어진 비석이 있다. 사당문양쪽에는 원형의 생화가 상장을 달고 너풀거리고 있었고 왼쪽 국기게양대에는 다올리지 않은 태극기가 나라를 위해 젊은 필를 내쏟고 쓰러진 장병들의 넋을 찬양하듯 흐린 하늘을 향해 펄럭거리고 있었다.

10시 정각 호국 순렬의 영령을 부르는듯 구슬피 흘러나오는 군악대의 주악리에 추도식은 개식되었다.

식장 옆에 장비된 5문의 거포는 일제히 포문을 열어 계속3발씩의 조포를 하늘높이 쏘아올려 추도식장을 진감시켰다.

곧이어 국기에 대한 배례가 있은후 식장에 참석한 수만시민들은 영령들의 영복을 비는 묵념을 올리고 팔만팔천오백사십일주의 가신임의 영혼을 길이 길이 추념하였다.

묵념이 끝난후 대통령의 추도사에 들어가자 사회자(국무원 사무국 전례과장(이창정))는 "이대통령 각하는 사정에 의해 못나오셨으니 추도사는 약하겠다"고 알리고 식순에 따라 헌화를 시작하였다.

정부를 대표하여 이 내무장관과 김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이 연합참모본부총장정 육군(정) 해군(정) 공군(김)등 각군참모총장과 해병대(김)사령관 및 제1야전군(백)사령관등 정부및 군최고수뇌부가 열을 지었고 그뒤 김병로 대법원장과 "유엔" 한위대표 "필립핀"의 "데카스트로"씨 미극동지상군 사령관 "화이트"대장등이 화환을 올리고 경의를 표하였다.

곧이어 유가족 대표로서 고안 안병범 소장 미망인 장옥시 여사와 12명의 각도 대표들이 마지막으로 화환을 올리고 식은 함 부통령의 기도와 육해공및 해병대의 합동조총으로 동10시30분 엄숙이 폐식되었다.

식이 끝나자 수많은 유가족들이 비석속에 잠든 남편과 아들을 찾아 울기 시작하여 식장은 오열과 통곡의 도가니로 변하였다.분향을 하다 땅에 주저앉고 나라를 위해 희생이 된 내 남편 내 아들의 영복을 통곡속에 빌고 있었다.

1956년 6월 7일 동아일보
사진 화살표 인물은 제3대 부통령 함태영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아닙니다. 그 해 대통령 선거(5월15일)로 부통령은 장면(민주당) 아마 출범 전이라 함 부통령이 참석했나 봅니다.

(1956년 6월 7일 경향신문 삽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나 제1회 현충일에 대통령 불참이라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니겠습니까?? 대충~소설을 쓴다면 5월에 있었던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은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은 장면 박사가 당선 자유당은 이기붕..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의장 같이 불참한 거 보니 선거가 영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그래도 그렇지 현충일이라고 하면 나라의 제삿날과 같은데 나라의 어른이 모양새 안 나게~~~~ 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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